무더웠던 여름날 지리산 산행기
몇 해 전 무덥던 여름날 등산지기인 후배와 나는 지리산 등반을 떠났다.
여름 산행은 잘 하지 않던 우리였는데 (우리는 주로 겨울산행을 즐긴다.)
그 해 여름은 왠지 지리산에 가고 싶었다.
금요일 저녁 차를 몰아 민박집에 도착했다.
성수기라 5만원을 받았는데 작은 방 하나에 선풍기 한 대만 덜렁..
공동화장실에 공동샤워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앞방에서 사람들이 새벽까지 술판을 벌였다.
덥고 불편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선잠을 자고 이른 새벽 중산리주차장으로 향했다.
이 민박집이 고행길의 서막이었다.
원래 생각했던 등반 코스는
중산리 – 장터목 – 천왕봉 – 세석대피소(1박) – 거림으로 하산 이었는데
왔던 길을 되돌아 가야하는 상황 때문에 경로를 변경하기로 했다.
중산리탐방소 – 칼바위 – 로타리대피소 – 천왕봉 – 장터목대피소 – 세석대피소(1박) - 거림
중산리-칼바위 코스는 난이도가 가장 높은 상 코스로 무더운 여름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이 코스로 향했다.
중산리 탐방소에 주차를 하고 얼음물 몇 개를 사서 가방에 넣었다.
대피소에서 꼭 돼지두루치기와 소주 한잔을 먹고 싶어
고기를 얼려왔기 때문에 얼음과 함께 가야만 했다.
얼음, 얼린고기, 코펠, 라면, 햇반, 김치, 가스, 옷가지 등등
세석대피소에서 1박을 하는 코스이기 때문에 당일치기 산행보다 짐이 많아 배낭이 무거웠다.
후배와 절반씩 나누어 배낭을 메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첫 발걸음은 가볍다.
시작 구간은 그늘도 제법 많아 시원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아간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옮긴다.
여름이라 땀으로 온 몸이 젖었지만 마음만은 상쾌하다.
어느덧 칼바위 구간을 지나 로타리 대피소 방향으로 접어 든다.
칼바위 구간까지는 산책하는 기분으로 가볍게 걸어왔는데 로타리 대피소 방향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힘들어 진다.
평소 같으면 그리 힘들지 않았을 텐데 배낭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배낭에 이것저것 너무 많이 담은 나의 욕심이 나를 힘들게 한다.
무엇이든 욕심이 지나치면 어려움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로타리 대피소에 도착해서 인생의 무게와 맞먹는 배낭을 내려놓으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휴대용 버너를 켜고 코펠에 물을 올려 라면을 끓인다.
산에서 먹는 라면 맛은 참 달다. 소박하지만 절박한 음식이 가장 맛있는 법이다.
달콤한 휴식 후 다시 배낭을 메고 천왕봉을 향해 출발한다.
이제부터 난코스가 이어지는 구간이다. 계속되는 오르막에 그늘마저 없다.
한 여름의 불볕 더위가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배낭과 햇살이 나의 어깨를 계속해서 짓누른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다른 등산객들도 힘에 겨운지 가쁜 숨을 내쉬며 더딘 걸음으로 오른다.
로타리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2km정도 되는 거리인데,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된다. 정말 눈물고개가 따로 없다. 땀이 눈물 흐르듯 흘러내린다.
쉬고 싶지만 포기하고 싶지만 한걸음 한걸음 스스로를 달래며 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한 여름의 땡볕 아래서 2시간여의 사투 끝에 드디어 천왕봉에 도착했다.
‘1915m 지리산 천왕봉’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천왕봉에서 잠시 땀을 식힌 뒤,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세석대피소로 향한다. 천왕봉에서 내려와 장터목대피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간식을 먹은 뒤 바로 세석으로 향한다. 시간이 다소 지체되어 여유가 별로 없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세석대피소에 도착해야 한다.
장터목대피소를 예약했더라면 중산리-장터목-천왕봉-로터리대피소-중산리 하산 코스를 택했을 것이다.
(보통 이렇게 많이들 오신다.) 그러나 장터목을 예약하지 못해 우리는 세석대피소까지 가야 한다.
무더운 여름 능선을 타고 세석까지 가려니 정말 힘이든다. 그늘도 별로 없는 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걷고 또 걸어서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세석대피소에 도착했다.
내 걸음이 느려 30분 이상 먼저 도착한 후배가 반긴다. 정말 힘겨운 산행이었다. 전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에서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하루 종일 걸었더니 머리까지 지끈 거린다.
그래도 세석대피소에 도착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대피소에는 따로 씻을 수 있는 곳이 없다. 땀을 비오듯 흘려 샤워를 하고 싶었으나 씻을 수가 없다.
후배와 둘이 계곡물이 있는 쪽으로 가서 간단히 씻고 와 저녁을 준비한다.
드디어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고기를 먹을 시간이다.
이 순간을 위해 이토록 많은 땀을 흘렸다. 양념고기와 햇반, 김치, 라면, 그리고 작은 소주 1병.
지금껏 내가 먹었던 음식 중 베스트 3 안에 드는 만찬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먹는 음식들이지만 이렇게 맛있었던 적은 없었다.
역시 무엇을 먹느냐 보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후배와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마치고 잠자리에 누웠다.
원래 3명 함께 오려고 했으나 1명이 빠져 예약된 3개의 잠자리를 두 명이 여유롭게 사용했다.
몸은 매우 피곤한데 잠자리가 편치 않아 잠을 설쳤다.
여기저기 코고는 사람들 소리에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은 다음날 새벽 일어나서 다시 천왕봉을 찍고 중산리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니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아침을 먹고 거림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거림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중간 중간 계곡이 많아 시원하게 내려올 수 있었다.
더우면 계곡 물에 머리도 감고 발도 담구며 시원한 하산을 하였다.
거림 방향으로 내려오면 마을에 다달아 콜택시 전화번호를 볼 수 있다.
우리는 택시를 불러 중산리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생애 가장 길고 험난했던 산행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히말라야트래킹이 더 힘들긴 했다.)
더위와 배낭의 무게로 힘겨웠지만
짧은 생애에 좋은 추억 하나를 더 한 것 같아 뿌듯한 산행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또 여름 산행을 하자고 한다면...ㅠㅠ
여름에는 시원한 계곡에서 물놀이나 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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